레오나르도 다 빈치

[위대한 다빈치의 ‘코덱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년~1519년)는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 과학자, 최초의 미래학자이자 공학자로서 르네상스의 민주주의적 이상을 그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대표한다.

과학적 탐구와 기계 공학적 창안에 충실한 바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비롯한 그의 모든 걸작들과 창작물들은 예술적 천재성과 과학 정신의 가장 조화로운 통일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리는 다빈치 코덱스展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그의 기록물인 ‘코덱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코덱스’가 의미하는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37년간 남긴 3만장 가량의 방대한 기록물이자, 서로 다른 장르의 융합이 실현되어가는 극적인 과정을 담은 모든 기록물을 통칭한다.

  • 1452년
    • 4월 15일

      토요일 밤 10시 30분경(르네상스 시대 시간으로는 ‘새벽 3시경’). 레오나르도는 서자로 태어남. 아버지 노릇을 한 할아버지 안토니오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1427~1504)에 의해 출생이 기록됨. 그의 어머니 카테리나는 젊은 농부의 딸로서 1453년에 아카타브리가 디 피에로 델 바카와 결혼함.

  • 첫번째 피렌체 체류 기간(1464/9~1482/3년경)
  • 1469년
    •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와 그의 삼촌 프란체스코의 세금신고서는 세르 피에로가 이미 피렌체 팔라초 델 포데스타(오늘날 팔라초 델 바르젤로, 법무장관의 집무실이 있음)에서 공증인으로 일하고 있음을 암시함.

  • 1473년
    • 8월 5일

      레오나르도는 한 풍경 소묘에 이렇게 기록함. “1473년 8월 5일,산타 마리아 델레 네베의 날”(피렌체, 우피치)

  • 1476년
    • 4월9일, 6월 7일

      안드레아 베로키오에 의해 고용된 레오나르도는 대장장이 공방에서 17세 도제 야코포 살타렐리와 동성애를 했다는 명목으로 다른 청년들과 함께 고소당함.공소가 기각됨.

  • 1478년
    • 1월 10일

      피렌체 팔라초 델라 시노리아의 산 베르나르도 예배당 제단화 제작을 의뢰받음.

    • 3월 16일

      산 베르나르도 예배당 제단화를 위해 처음 급여를 지급받음(25플로린).

    • 12월 28일

      며칠 동안 레오나르도는 매달려 있는 베르나르도 디 반디노 바론첼리의 시체를 스케치함(바욘, 보나 미술관 소장).

    • 9~12월

      우피치에 있는 소묘에 다름과 같이 기록함. “1478년부터 나는 성모 마리아를 테마로 두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  
  • 1481년
    • 7월

      레오나르도는 <동방박사들의 경배> 제단화 제작에 착수함. <동방박사들의 경배> 제작 계약서상의 메모에서, 수도사들은 산 도나토 아 스코페토 수도회 성당의 주 제단을 위한 계약을 기록.

    • 6~9월

      산 도나토에서의 작업으로 돈과 생필품을 지급받음.

    • 9월28일

      산 도나토에서의 작업으로 와인을 지급받음.

  • 첫번째 밀라노 체류 기간(1481~1499년)
  • 1481 ~1483년
    • 1481년 9월~1483년 4월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가기 위해 피렌체를 떠남.

  • 1483년
    • 4월 25일

      레오나르도는 에반젤리스타 다 프레디와 조반 암브로조 다프레디스와 함께, 밀라노의 산 프란체스코 일 그란데 성당 예배당에 무원죄잉태회를 위한 제단 장식 계약에 서명함.

  • 1485년
    • 3월 16일

      레오나르도는 태양의 전체 일식을 관찰함.

    • 4월 23일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헝가리 왕 마티아슈 코리비누스 궁정의 대사 마페오 다 트레빌리오에게 서신을 보내어, 왕의 자비로 레오나르도와 성모 그림을 계약했다고 언급함.

  • 1488년
    •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대성당의 티부리오 프로젝트에 대한 급여를 추가로 수령함.

  • 1489년
    • 4월 2일

      레오나르도는 두개골 습작들 중 하나에 다음과 같이 기술함. “1489년 4월 2일에…[인간 형상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책”(윈저 궁,왕립도서관,19059)

    • 7월 22일

      일모로가 스포르차 기마상 모델을 레오나르도에게 위임했지만, 여전히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한두 명의 기술자’를 더 필요로 한다고 언급함.

  • 1490년
    • 1월 13일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공연할 베르나르도 벨린치오니의 <천국의 축제La Festa del Paradiso>를 위한 무대 세트를 제작함.

    • 7월 22일

      열 살의 살라이(쟌 쟈코모 카프로티 디 오레노)가 레오나르도의 공방에 옴.

    • 9월 7일

      살라이는 마르코(돗조노?)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조수들 중 한 사람에게서 은침을 훔침.

  • 1491년
    • 1월 26일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결혼 축하 향연과 시합을 준비하기 위해 갈레아초 다 산세베리노의 집에 머무름.

    • 4월 2일

      살라이는 조반 안토니오(볼트라피오?)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공방의 조수들 중 한 사람에게서 은침을 훔침.

  • 1493년
    • 11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기마상(레오나르도의 실제 스포르차 말 모형 혹은 그의 디자인에 근거한 한 이미지)은, 루도비코의 조카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의 결혼 축하연이 베풀어지는 동안 밀라노 대성당 내의 승리 기념 아치 아래에 전시됨.

  • 1494년
    • 1월

      비제바노에 머무름.

    • 11월 17일

      루도비코 스포르차 일 모로는 스포르차 기마상을 제작할 청동을, 대포 제작을 위해 장인인 페라라 공작 에르콜 데스테에게 보냄.

  • 1495년
    • 피렌체에서 ‘살라 델 그란 콘실리오’ 건축을 위한 컨설턴트로 일함.

    • 11월 14일

      기록에 따르면,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 내의 방을 장식하는 일에 참여함

  • 1497년
    • 6월 29일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비서 마르케지노 스탄냐에게 메모를 전달. 거기에는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을 빨리 마무리짓고 식당의 다른 벽화 작업에도 착수할 것을 희망하는 내용이 적힘.

  • 1498년
    • 레오나르도, 밀라노의 포르타 베르첼리나 근처에 있는 마리올로 데 귀스카르디의 교외 빌라를 디자인함.

    • 2월 8일

      프라 루카 파촐리는 자신의 [신적 비례론De Divina Proportione]을 루도비코에게 헌정함. 스포르차 기마상의 길이가 12브라챠(‘목덜미에서 바닥까지의 높이’,약 7미터 이상)인 것과 그 부피가 20만 리브르(즉, 6만 7천 8백 킬로그램)나 되는 것을 지적하면서 레오나르도에게 경의를 표함.

    • 4월 20,21,23일

      기록에 따르면,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 북서쪽 탑에 있는 살레타 네그라와 살라 델레 아세의 벽화를 작업함.

  • 1499년
    • 4월 26일

      루도비코 스포르차, 산 비토레 수도원과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사이 에 위치한 포르타 베르첼리나 근처 포도밭을 레오나르도에게 줌.

    • 10월

      루이 12세, 밀라노 입성.

    • 12월 14일

      밀라노, 프랑스에 완패.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에서 자기 계좌에 송금. 루카 파촐리와 함께 도시로 되돌아갈 것을 예상함.

  • 두번째 피렌체 체류 기간(1500~1508년)
  • 1500년
    • 레오나르도는 신비로운 로마 여행에서, 가능하면 나폴리 여행에 리니 백작 루이 드 뤽상브르(샤를8세, 훗날 루이 12세)를 동반함. 레오나르도는 루트크족의 프리울리 지역 침략 위협에 저항할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국에서 일함. 볼트라피오와 함께, 레오나르도는 볼로냐에서 카시오의 손님 이었을 것이다.

    • 3월 13일

      류트(기타 비슷한 현악기) 연주자 로렌초 구스나스코 다 파비아는 베네치아에서 이사벨라 데스테에게, 레오나르도가 자신에게 그녀의 초상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보냄.

    • 4월 24일

      레오나르도, 피렌체 도착.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성당 단지에 머문 것으로 추측됨. 그곳은 그가 <성 안나와 성모자>의 밑그림을 그린 곳임.

    • 8월 11일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곤챠가에게 피렌체 근처 안젤로 델토발리아 빌라의 설계도를 보냄.

  • 1501년
    • 3월 28일

      만투아에서 이사벨라 데스테는 프라 피에트로 다 노벨라라(피렌체의 카르멜 수사회)에게 레오나르도의 활동들에 관한 정보수집을 요청함

    • 4월 3일

      프라 피에트로는 레오나르도가 <성모자, 성 안나, 그리고 양>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 작업 중이라고 답함.

    • 4월 14일

      프라 피에트로는 이사벨라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레오나르도가 루이 12세의 부하 장관인 플로리몽 로베르테를 위해 <방직기의 성모>를 그리고 있다고 언급합.

  • 1502년
    • 5월~8월 18일

      교황 휘하 군대 대장인 체사레 보르자 일 발렌티노는 레오나르도를 마르케와 로마냐의 ‘친근한 건축가이자 평범한 공학자’라고 칭함.

    • 7~9월

      레오나르도는 체사레 휘하에서 복무하던 중에 우르비노, 페세나, 포르초 체세나티코, 페사롬 리미니 등지를 여행함.

  • 1503년
    • 레오나르도는 보스포루스의 다리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술탄 비야지드에게 서신을 보냄

    • 2월

      레오나르도, 피렌체로 되돌아감.

    • 3월 9일~6월 23일

      무원죄잉태회 측의 공증인은 <암굴의 성모>에 관련한 사건들을 요약함.

    • 6~7월

      피사가 공격받는 동안 레오나르도는 캄포산토에 머물면서 피렌체 시뇨리아를 위해 지형을 스케치하고 병기와 요새의 설계도를 제작함.

    • 7월 24일

      레오나르도는 피사에서 아르노 강을 측량하기 위해 피렌체 시뇨리아로부터 급여를 지급받음

    • 10월 24일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수도원에 있는 살라 데 파파와 그 밖의 인접한 다른 방들의 열쇠를 수령함. 레오나르도는 이곳을 <앙기아리 전투>의 밑그림을 준비하는 동안 공방과 거주지로 사용함.

  • 1504년
    • 1월 25일

      29명과 함께,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의 거인 대리석 <다비드>의 최종 위치를 논하는 회합에 참여함.

    • 2~10월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 전투> 밑그림 작업에 대해 규칙적으로 급여를 지급받음.

    • 6월 30일

      레오나르도의 파옴비노의 영주 야코포 4세 아피아니의 요청으로 군사공학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피사 전쟁 동안 피렌체의 동맹국 피옴비노로 감.

    • 7월 9일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 디 안토니오 다 빈치, 피렌체에서 사망. 그의 유산 문제로 거의 6년 동안 레오나르도와 그의 호적상 형제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남.

    • 11월 30일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원을 네모로 만드는 문제를 ‘풀었다’고 기록함.

  • 1505년
    • 4월 30일

      <앙기아리 전투>를 위한 추가 비용이 발생함. 작업에 참여한 조수들은 라파엘로 단토니오 디 비아조, 페르란도 스파뇰로, 그리고 페르난도에게 ‘안뇨를 빻는 사람’ 토마소 디 조반니 등 이다.

  • 두번째 밀라노 체류 기간(1506~1513년)
  • 1506년
    • 4월 2일

      피렌체의 조반 암브로조 다 프레디스는 레오나르도를 대신하여 여전히 미완성작으로 보이는 <암굴의 성모>에 관해 무원죄잉태회와 합의를 봄.

    • 9월초

      레오나르도는 살라이, 로렌초, ‘일 판포이아’와 함께 밀라노로 떠남.

  • 1507년
    • 7월 26일

      플로리몽 로베르테는 미완성작 <앙기아리 전투>를 두고 벌어진 피렌체 시노리아와 레오나르도의 논쟁에 개입, 왕을 대신하여 ‘신뢰받는 화가이자 공학자인 친애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로 와줄 것을 요구함.

    • 8월 3일

      도미니크회 교단의 구성원이 레오나르도와 조반 암브로조 다 프레디스와의 논쟁에서 중재인으로 임명됨.

  • 1507 ~ 1509년 겨울
    • 레오나르도는 1507~1508년 겨울에 피렌체로 되돌아옴. 또한 그는 그 해 겨울 약 100세로 추정되는 한 노인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에서 해부함.

  • 1508년
    • 4월 23일

      레오나르도는 루이 12세 휘하에서 일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되돌아옴.

    • 7월

      1508년 7월부터 1509년 4월까지 레오나르도는 프랑스 왕에게서 받는 급여를 기록.

    • 10월 12일

      레오나르도, <암굴의 성모>의 양도 영수증을 인정.

    • 10월 23일

      조반 암브로조 다 프레디스는 <암굴의 성모> 복제에 관해 최종 급여 100리르 임페리알리를 수령.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무원죄잉태회의 부채 청산을 확인함.

  • 1509년
    • 4월 28일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기하학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기록함.

  • 1510년
    • 10월 21일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대성당의 성가대석 디자인에 관한 조언을 요청받음.

  • 1511년
    • 1월 2일

      레오나르도는 ‘살루초 위쪽’ 채석장에는 ‘크지는 않지만’ 견고한 반암 대리석이 있다고 기록함. 그리고 자신의 친구 장인 베네데토가 물감을 섞을 화가용 팔레트로 쓸 수 있도록 자신에게 일부 주기로 약속했다고 기록함.

  • 1513년
    • 3월 25일

      레오나르도가 밀라노로 되돌아온 것으로 보임. 밀라노 대성당 벽돌 작업의 장부들 중 하나에 그의 이름이 등장함.

  • 로마 체류기(1513~1516년)
  • 1513년
    • 9월 24일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함. “나는 밀라노를 떠나 9월 24일에 로마로 갔다. 조반 프란체스코(멜치), 살라이, 로렌초, ‘일 판포이아’를 동반했다.”

    • 12월 1일

      레오나르도는 로마에 줄리아노 데 메디치(교황 레오 10세의 형제)의 왕실의 일원으로 체류함. 메디치는 바티칸 궁 익부 벨베데레에 공방을 만들어 미술가를 관리함.

  • 1514년
    • 7월 7일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함. 지리적 문제는 “일 마그니피코(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나를 위해 만든 벨베데레 공방 안에서 7월 7일 23시에 마무리되었다.”

  • 1515년
    • 1월 9일

      레오나르도는 자신을 고용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사부아와 결혼하기 위해 새벽에 로마를 떠났다고 기록함.

    • 7월 12일

      왕좌 복귀차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프랑수아 1세의 리옹 입성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레오나르도가 창안한 기계 사자(일명 ‘마르초코’-옮긴이)가, 우르비노의 군주 로렌초 피에로 데 메디치가 증정하는 선물로 선보임.

    • 11월 20일

      교황 레오 10세가 승리를 축하하며 피렌체로 입성, 레오나르도와 그의 고용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교황의 수행원으로 여행을 떠남. 레오나르도는 로첸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계획함. 이곳은 미켈로초의 팔라초 메디치와 마주보고 있음.

  • 1516년
    • 3월 13일

      레오나르도는 기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기록함.

    • 3월 17일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죽고,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함.”메디치는 나를 만들었고, 나를 파괴했다.”

    • 8월

      레오나르도는 로마에 있는 산 파울로 푸오리 레 무라의 거대한 초기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를 측정함.

  • 프랑스 체류기(1516~1519년)
  • 1516년
    • 레오나르도는 프랑수아 1세의 수석 화가로서 프랑스로 떠남. 멜치와 살라이를 동반.

  • 1517년
    • 5월

      예수 승천일: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앙부아즈와 클루에 있음을 기록.

    • 10월 1일

      리날도 아리오스토가 만투아의 페데리코 곤챠가에게 보낸 서신에서 아르장탕의 프랑수아 1세를 위한 축전을 묘사함.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계 사자를 언급함. “사자는 열려 있다. 안쪽은 전부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파란색은 이곳 관습에 따르면 사랑을 상징한다.”

    • 10월 10일

      레오나르도는 아라곤 추기경 루이지와 그의 수행원 안토니오데 베아티스의 방문을 받음. 안토니오 데 베아티스는 자신의 일기에 이 사실을 기록하고, 세 회화작품들, 즉 ‘위대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요구에 의해 실제처럼 그려진 어느 피렌체 여인’의 초상, 젊은 성 세례 요한, 성모자와 성 안나의 초상 등을 감상함. 레오나르도는 오른팔 마비 증세로 고통스러워 함. 아마도 붓질 대문인 듯한데, 이 때문에 “소묘 작업이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만 할 뿐, 더 이상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불가능하게 됨.”

    • 12월 29일

      데 베아티스는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식당을 찾아가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감상했다고 일기에 기록함. “매우 훌륭한 작품이나 상태가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고 있다.”

    • 그 해 마지막 날

      레오나르도는 프랑수아 1세의 궁전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로모랑탱에서 작업한 것으로 기록됨.

  • 1518년
    • 1월 16일까지

      레오나르도는 왕궁과 관련된 운하를 기획하기 위해 로모랑탱에 머무름.

    • 6월 19일

      로렌초 데 메디치와 프랑수아 1세의 조카 마들렌 드 라 투르도베르뉴와의 결혼을 축하하여, 1490년에 레오나르도는 클루에서 기계로 움직이는 무대 배경으로 <천국의 축제>를 선보임.

    • 6월 24일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앙부아즈에 있는 클루의 성으로 가기 위해 로모랑탱을 떠난다고 기록함.

  • 1519년
    • 4월 23일

      67세의 나이로 병약해진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앙부아즈의 왕궁으로 감.

    • 5월 2일

      레오나르도는 클루의 성에서 사망. 그의 유언에 따라 앙부아즈의 생 플로렝탕 성당 수도원에 묻힘.

    • 6월 1일

      레오나르도의 사랑하는 동료이자 예술적 후계자인 프란체스코 멜치는 레오나르도의 배다른 형제 줄리아노 다 빈치에게 서신을 보내 레오나르도의 죽음을 가족에게 알림.